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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한영
부산대학교 일반사회교육과에서 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법학에세이', '피터와 앨리스와 푸의 여행', '게임의 법칙' 등의 책을 썼고 네이버프리미엄에서 '우리가 사랑한 책들'이라는 연재도 하고 있습니다.
"간절히 원해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있다".. 멋진 포기에 대하여
*이 글은 외부 필자인 곽한영님의 기고입니다. 해도 해도 안 되는 일 성공과 실패에 관한 이야기의 연재를 시작하면서 마음속으로 다짐했던 것 중 하나는 이 시리즈가 '성공하는 법'을 알려주는 실용서와 같은 내용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다른 사람에게 성공의 비결을 알려줄 만큼 대단한 성취를 거둔 인생을 살아온 사람도 아니고 더구나 각각의 사람은 모두 서로 다른 하나의 '우주'이기 때문에 내가 알고 생각하는 것들이 똑같이 도움이 될 리도 만무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사람의 삶이 가장 극적으로 부각되는 지점이 그들이 성공으로 밀어 올려지거나 실패로 내동댕이쳐지는 바로 그 순간의 이야기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성공과 실패를 통해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지난 글 가운데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보다는 실패한, 혹은 실패한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더 많이 다룬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게 최종적인 결과인 승리나 패배이기 이전에 '포기'하는 경우라면 어떨까요? '너무 지독하게 열심히 사는' 것으로 세계적으로 정평이 난 우리나라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포기가 실패보다 더 부끄러운 의지의 부족, 나약함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게 아니다 싶은 경우에도 '하면 된다', '안되면 되게 하라'의 정신으로 무작정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이 아름다운 미덕이자 멋진 삶의 태도로 여겨져온 듯합니다. 정말 그런 것일까요? 꽤 오래된 영화지만 1993년에 문성근, 김희애씨가 주연을 맡은 '101번째 프로포즈'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동명의 일본 드라마를 영화화한 것인데 제목만 들어도 이미 누구나 줄거리를 예상할 수 있을 만큼 다소 뻔한 '연애성공담'을 담은 영화였습니다. 평범한 건설회사 계장으로 일하는 노총각이 자신에게 과분한 첼리스트 여성에게 끊임없이 대시를 하고 걸맞은 결혼 상대가 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다 급기야 사법시험까지 시도한 끝에 그 진심에 반한 여성과 결혼에 성공한다는 이야기. 이 이야기의 공감대가 얼마나 넓었는지 원작인 일본 드라마의 인기도 좋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93년에 영화로, 2006년에 다시 드라마로 두 번이나 리메이크가 되었고 중국에서도 드라마와 영화로 거듭 만들어질 정도로 공전의 히트작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101번째 프로포즈'라는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 퍼뜩 가벼운 거부감이 들었습니다.
곽한영
부산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
26일 전
높은 산을 오르는 법
*이 글은 외부 필자인 곽한영님의 기고입니다. 언덕길의 시작 열 번 정도를 예정하고 시작했던 '성공과 실패' 이야기가 오늘 넘버링을 붙이다 보니 어느새 그 두 배가 넘는 스물여덟 번째에 이르렀네요. 딱히 이룬 것도 없어서 성공도 그렇다고 치열하게 실패해본 경험도 없는 사람이 이런 글을 써도 되나 매번 주저했지만 글에 담긴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읽어내는 현명한 독자분들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이번 달에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고민하던 중 가수 정인 씨의 '오르막길'을 들으면서 여러 가지 풍경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그 노래의 가사들을 디딤돌로 삼아 몇 가지 이야기를 풀어볼까 합니다. 이 노래의 가사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 이제부터 웃음기 사라질 거야 가파른 이 길을 좀 봐 그래 오르기 전에 미소를 기억해두자 오랫동안 못 볼지 몰라 완만했던 우리가 지나온 길엔 달콤한 사랑의 향기 이제 끈적이는 땀 거칠게 내쉬는 숨이 우리 유일한 대화일지 몰라 ♫ 이 노래를 만든 윤종신 씨가 어떤 풍경을 보면서 이 노래를 떠올렸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이 가사를 듣고 맨 처음 떠올린 기억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갔던 지리산 종주였습니다. 대학 시절 그저 친구들과 분위기에 휩쓸려 치기 어린 마음으로 갔던 3박4일간의 지리산 여행에서 제일 처음 마주친 코스가 바로 화엄사에서 노고단에 이르는 7킬로미터 구간이었습니다. 시작은 참 좋았죠. 화엄사의 고색창연한 풍경을 구경하느라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친구들과 깔깔거렸고 화엄사 계곡을 오르는 길도 돌이 많이 깔려 있어서 다소 힘들긴 했지만 친구들과 농담도 하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가끔 뜀박질도 할 만큼 젊음으로 버틸 만한 길이었습니다. 지리산, 뭐 별거 없네, 라는 건방진 생각을 떠올린 바로 그 순간 눈 앞에 펼쳐진 까마득한 고개를 발견하고 입을 딱 벌렸습니다. 오르막이 어디까지 이어져있는지 아득하기만 한데 경사가 어찌나 가파른지 기어오르다시피 올라야 하는 그 고개의 이름은 오르다보면 코가 땅에 닿는다는 '코재'였습니다. 노래 가사처럼 웃음기 사라지고 오랫동안 미소를 잃게 될 장면의 시작이었습니다. 온통 돌투성이의 길에 다리에 번번이 끙끙거리며 힘을 주지 않으면 한 걸음도 오르기 힘든 경사에 친구들과 저는 금세 지쳐버렸는데 잠시 숨을 돌리려고 보니 일행 모두 물이 떨어졌습니다. 화엄사에서 까불고 노느라 물을 담아오는 것을 깜박한 것이었습니다.
곽한영
부산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
2024-02-28
'적당히 하기'의 중요성
*이 글은 외부 필자인 곽한영님의 기고입니다. 실감 나는 게임의 조건 만약 어느 날 갑자기 램프의 요정이 나타나서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말하면 무얼 말씀하시겠습니까? 영원한 생명, 한없는 돈, 언제나 20대로 살아가기 등등 여러 가지 환상적인 일들이 떠오르지만 현실적으로 꿈꿔볼 수 있는, 하지만 의외로 쉽지 않은 일 중 하나는 '지금과는 다른 인생을 살아보기'가 아닐까 합니다. 예전에는 그런 꿈을 이뤄주는 간접적인 수단이 책이나 영화였다면 요즘은 내가 직접 그 세계 속으로 들어가 그 세계의 일원이 될 것처럼 돌아다니고 행동할 수 있는 게임이라는 수단이 각광을 받고 있죠. 제가 요즘 빠져있는 게임은 커다란 트레일러를 몰고 유럽 대륙을 누비며 물건을 배달하는 '유로 트럭 시뮬레이터2'입니다. 사실 게임의 내용 자체는 별게 없습니다. 위에 설명한 문장이 전부라고 할 수 있을 정도죠. 다만 그 '체험'이 상당히 리얼합니다. 처음엔 회사차를 빌려서 운전하다가 나중엔 돈을 모아 자신의 차를 사고 조금씩 수리하거나 업그레이드하다가 더 좋은 차로 바꾸는데 은행 대출을 받을 수도 있고 중고차를 구입할 수도 있습니다. 운전 자체의 리얼함은 더 말할 필요가 없죠. 실재하는 트럭의 모델을 그대로 가져와서 내외관을 재현했고 신호위반 딱지, 교통체증, 과속카메라가 있고 밤에는 라이트켜고 비 오면 와이퍼 작동시키고 마구 끼어드는 차들도 있고 빵빵거려도 안 가는 차들도 있고 레이싱 핸들까지 구입하면 차의 진동까지 손에 전달되는데 유럽 라디오 수신기능도 있어서 라디오 틀어놓고 수동기어 바꿔가며 핸들 돌리노라면 내가 진짜 유럽의 트럭운전사가 된 기분입니다.
곽한영
부산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
2024-01-30
수학 박사는 어떻게 올림픽 사이클에서 우승할 수 있었나
*이 글은 외부 필자인 곽한영님의 기고입니다. 기적적인 승리 이제는 벌써 희미하게 잊혀가는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습니다만 2020년 열릴 예정이었던 도쿄 올림픽은 일본의 입장에서는 사활을 건 이벤트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잿더미로 변했던 일본은 1964년 도쿄 올림픽을 계기로 세계 무대에 화려하게 복귀했습니다. 어떤 이벤트는 결과를 보여주는 전시장이 되기도 하지만 그 이벤트 자체가 발전의 동력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마치 중간고사, 기말고사라는 이벤트 때문에 공부에 집중하게 되는 학생들처럼 말이죠. 1964년 올림픽도 일본에 바로 그런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올림픽을 계기로 고속철이 개통되고 도시환경이 개선되고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흔히 쓰이는 픽토그램도 개발되었으며 컬러TV, 더 나아가 VTR의 개발마저도 64년 올림픽을 기점으로 이루어진 획기적인 변화였습니다. 그래서 장기불황에 고령화사회의 그림자까지 겹쳐 신음하던 일본의 입장에서 2020 도쿄 올림픽은 1964년의 영광을 되살리고 재도약을 시도하는 엄청난 기회였습니다. 하지만 이미 많은 분들이 아시는 것처럼 여러 면에서 준비가 부족한 부분도 있었고 결정적으로 하필이면 바로 그 시점에 전 세계를 덮친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올림픽 개최 자체가 연기되었다가 이듬해인 2021년에야 간신히 열릴 수 있었습니다. 여전히 코로나의 위세가 강력하던 시점이라 올림픽을 여는 것 자체가 논란의 대상일 정도였으니 사실상 대규모의 관중동원도, 흥행도 기대할 수 없는 반쪽짜리 이벤트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회 초반인 2021년 7월 25일 열린 여자 도로사이클 경기 결과가 큰 화제를 모았습니다. 원래 여자 도로사이클은 그리 주목도가 높은 종목은 아니지만 금메달을 차지한 오스트리아의 안나 키센호퍼 선수가 아무도 우승을 예상하지 못한 낮은 순위의 선수였고 심지어 수학 전공 박사에 현직 연구원이자 교수인 완전 아마추어 선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곽한영
부산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
2024-01-02
완벽의 함정.. 불안을 견뎌야 하는 이유
*이 글은 외부 필자인 곽한영님의 기고입니다. 동방불패의 패배? 오늘 이야기는 제목부터가 뭔가 무협지 느낌이 나지 않습니까? 얘기가 나온 김에 정말로 무협지의 한 토막 이야기로 시작을 해볼까 합니다. 혹시 '소오강호'라는 무협지를 아시나요? (참조 - 소오강호) '영웅문'으로 유명한 김용의 대표작 중 하나로 '독고구검'이라는 검술을 펼치는 호걸 영호충의 모험과 사랑을 다룬 유명한 무협지입니다. 그런데 이 소설은 특이하게도 주인공인 영호충보다 악역인 마교의 교주 '동방불패'가 더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수를 놓을 때 쓰는 바늘을 무기로 쓰면서 신출귀몰하는 최강의 무술을 갖춘 고수로서 그의 면모가 매우 인상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소설을 읽지 않은 분들은 좀 의아하실 수 있습니다. 아니 이름에 '불패'가 들어갈 정도로 막강한 고수인데 과연 영호충은 어떻게 그를 꺾을 수 있었을까? 소설 속에서는 여러 가지 우연과 고수들의 협공 등이 묘사되어 있지만 제가 소설을 읽을 때 제일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가 불과 몇 명의 동료들과 함께 동방불패의 요새인 '흑목애'에 잠입한 장면이었습니다. 고수라고는 하지만 서너명밖에 안되는 일행의 힘으로 수백, 수천을 헤아리는 마교의 고수들과 싸우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지만 일단 그들이 몰래 동방불패의 집무실 격인 '성덕전'에 뛰어들자 당연히 그를 쫓아야 할 흑목애의 호위무사들은 추격을 포기해버립니다. 왜냐하면 마교에는 무기를 든 자가 성덕전 안에 한 발이라도 들여놓으면 사형에 처하는 대역죄를 범한 것으로 본다는 매우 무서운 규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무사들이 움찔거리는 사이에 동방불패의 애인을 인질로 잡은 영호충 일행은 결국 이 인질을 이용해서 동방불패를 꺾을 수 있었습니다.
곽한영
부산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
2023-12-14
쓸데없는 짓의 쓸모
*이 글은 외부 필자인 곽한영님의 기고입니다. 대나무통으로 바닥을 긁는 남자 2020년 유명을 달리한 엔니오 모리코네는 아마도 20세기를 대표하는 영화음악가로 역사에 남겨질 것입니다. 약 60 여년에 걸친 활동 기간 동안 400편이 넘는 작품, 7000만장이 넘는 앨범 판매고 전 세계 3301장의 앨범에 자신의 작품을 수록한 작곡가가 다시 나오기는 힘들지 않을까요? 그런 엄청난 성공의 바탕에는 단순한 다작의 능력을 넘어서서 도저히 한 사람의 작품으로는 여겨지지 않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만들어내는 그의 입체적인 작품세계가 큰 힘이 되었습니다. 사실 한 사람이 여러 장르의, 여러 색깔의 음악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애초에 예술작품이라는 것이 작가 자신의 경험과 세계관을 투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두세 개의 걸작은 있을 수 있어도 매번 다른 모습을 보이기는 어려운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음악을 들으면 모르는 곡이라도 가수나 작곡가가 예상되는 것은 그런 '세계관의 한계'에서 비롯되는 결과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엔니오 모리코네는 그 한계를 어떻게 뛰어넘을 수 있었을까요? 몇 달 전 개봉했던 그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고 관련된 자료들을 찾아보면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훗날 대중음악가로 명성을 떨쳤지만 원래 그는 프로 트럼펫 연주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트럼펫을 배웠고 열네 살에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음악 학교 중 하나인 산타 체칠리아 국립음악원에 입학한 클래식 영재였습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클래식 음악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고 결혼 후 아이까지 태어나자 어쩔 수 없이 대중음악 편곡자의 길에 발을 들여놨습니다. 대중음악을 경멸하던 스승과 동료들의 시선을 피해 가명까지 써야 했죠. 하지만 워낙 탄탄한 음악교육을 받아온 터라 작업 자체는 수월하게 진행되었고 그는 곧 많은 사람들이 찾는 편곡자이자 연주자로 안정된 삶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대로 편안한 삶에 안주하거나 혹은 다시 클래식 작곡가로 돌아가 살아갈 수도 있는 상황에서 엔니오는 좀 엉뚱한 선택을 합니다. 친구들과 함께 전위음악 그룹인 '새로운 조화의 즉흥연주 그룹'(Gruppo di Improvvisazione di Nuova Consonanza)을 만든 것입니다.
곽한영
부산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
2023-11-15
상상하지 않는 것은 죄악이다.. 숫자 너머를 보는 힘
*이 글은 외부 필자인 곽한영님의 기고입니다. 로마의 비극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는 독재자 무솔리니를 중심으로 독일의 히틀러와 돈독한 협력관계를 구축한 추축국의 일원이었습니다. 하지만 연이은 패배와 실정의 결과 무솔리니는 권좌에서 축출되었고 뒤를 이은 바도글리오 정권이 연합군에 항복하려는 모습을 보이자 독일은 군대를 동원해 이탈리아를 직접 점령해버렸습니다. 하지만 애초에 동맹국이었던데다가 교황이 있는 바티칸은 히틀러도 함부로 짓밟기를 꺼리는 곳이었기 때문에 로마 지역을 담당하고 있던 나치 친위대 카플러 대령은 교황청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며 예술품 빼돌리기에 더 골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944년 3월 23일 행진하던 독일군 보병들이 이탈리아 레지스탕스의 습격을 받아 33명이나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로마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뒤집히게 됩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히틀러가 분노에 휩싸여 '열 배의 보복'을 명령하면서 자그마치 330명이나 되는 이탈리아인들의 사살을 명령한 것입니다. 이 내용을 담은 영화가 바로 1973년 개봉한 '로마여 영원하라'입니다. 제목으로 보면 로마에서 벌어진 독일군과 레지스탕스의 영웅적인 전투를 다룬 영화 같지만 원제가 'Massacre in Rome' 즉, '로마 학살'이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영화는 액션 장면이 거의 등장하지 않고 이 히틀러의 학살 명령을 카플러 대령이 어떻게 수행해내는지 그 비극의 과정만을 다룬 드라마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게 픽션이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며 오히려 역사 속의 실제 모습은 훨씬 엉망진창이고 더 비극적이었다는 점입니다. 어이없는 학살?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실제 사건은 '아르데틴 학살'(Ardeatine Massacre)입니다. 로마 근교에 있던 '아르데틴 동굴'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죽였기 때문에 이런 명칭이 붙었습니다. 실제 사정이 영화의 내용과 약간 다른 부분이 있는데 '열 배의 보복'이 히틀러의 아이디어가 아니라 카플러 대령과 그의 상관이었던 묄처 장군의 착상이었다는 점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정규군도 아닌 레지스탕스, 그것도 총통이 무시해 마지않는 전투력을 보였던 이탈리아 레지스탕스에게 독일군 정예부대 33명이 전멸한 것에 대한 책임을 피하기 위해 사고에 대한 보고와 함께 이런 끔찍한 아이디어를 상신한 것으로 보입니다. 히틀러는 '이탈리아인보다 열 배 더 가치 있는 독일인의 생명'이라는 아이디어에 흡족해한 듯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는지 '24시간 안에 사형을 집행하라'는 명령을 덧붙여 내립니다.
곽한영
부산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
2023-10-18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조건.. 과감한 결단, 그보다 더 힘든 기다림
*이 글은 외부 필자인 곽한영님의 기고입니다. 불가능한 선택 우리가 짧지 않은 삶을 살아가다 보면, 특히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들, 돈과 일들에 얽혀서 이리저리 부딪치다 보면 아찔한 순간들을 만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 같습니다. '위기'라고 불리우는 순간들이죠. 그건 출근 지하철에서 고개를 숙였더니 화장실 슬리퍼를 그대로 끌고 나온 것을 발견한 순간 같은,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저 재밌는 이야깃거리로 남을 수준의 문제일 때도 있지만 때로는 35톤 덤프트럭이 내 차 바로 뒤에서 급정거하는 생과 사를 오가는 심각한 문제일 때도 있습니다. '위기'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꽤 오래 전부터 생각해오던 문제 하나가 떠오릅니다. 원래 머릿속에 잡다한 생각이 많고, 순발력도 떨어지는 편이라서 혹시 누군가 곤란한 질문을 해오면 어떻게 대답할까 미리 생각해보곤 합니다. 예를 들어 편의점에서 산 콜라캔을 땄더니 지니가 불쑥 튀어나와서 세 가지 소원을 물으면 뭐라고 답해야 하나 같은 문제, 탄산이 빠지면 무효라고 혀를 차며 도망가버릴지도 모르니 우물쭈물하지 않고 재빨리 대답하려면 미리 고민을 좀 해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절대로 오지 않을 것 같은 위기에 대한 쓸데없는 고민' 중 하나가 '비밀 임무의 문제'입니다. 007이나 미션임파서블 같은 첩보영화에 보면 대개 영화 앞 부분에 클리셰처럼 반복되는 장면이 있잖아요. '이 임무에 대해서는 극소수의 사람들만 알고 공식적인 기록으로 남지 않으며 체포될 경우 우린 당신의 존재를 부인할 것이다' 이런 얘기, 마치 경찰 영화에서 범인을 붙잡을 때마다 읊어주는 '미란다 원칙' 같이 반복되는 말이라서 이런저런 영화를 많이 보다 보면 그저 그런가보다 생각하고 넘어가게 되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이건 상당히 심각한 말입니다. 대개 이런 말을 하는 경우는 미국의 CIA나 영국의 MI6 같은 대외첩보업무를 하는 기관들이 많습니다. 단순히 위험한 일이라서가 아니라 그 임무가 외국의 요인 암살이나 시설 파괴 등 불법적이며 때로는 해당국의 주권을 침해할 여지가 있는 '더러운 일'이기 때문에 '우린 모르는 일'이라는 단서를 붙이는 것이지요. 그런데 좀 더 생각해봅시다. 과연 내 존재를 부인할 정도로 이 문제에서 발을 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임무가 끝나고 나서도 나를 지켜주려고 할까요?
곽한영
부산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
2023-09-14
왜 은퇴한 선수들이 김성근 감독 앞에서 긴장하는가
*이 글은 외부 필자인 곽한영님의 기고입니다. 김성근 감독의 카리스마? JTBC에서 방영하는 '최강야구'라는 프로그램을 아시나요? 사실 저는 야구를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이 프로그램은 꼬박꼬박 챙겨보고 있습니다. 어떤 프로그램인지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잠시 설명드리자면 박용택, 정근우, 이대호 등 현역 시절 '레전드'로 불렸던 프로야구 은퇴선수들이 '최강 몬스터즈'라는 팀으로 다시 뭉쳐 고등학교, 대학교 혹은 프로야구 2군까지 현역 선수들과 승부를 겨루는 야구 예능 프로그램입니다. 프로그램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 초대 감독은 이승엽 선수였습니다. 삼성 라이온즈 출신으로 '라이언킹'이라는 별명을 얻었을 만큼 우리 프로야구의 한 시대를 대표하는 선수였죠. 굳이 명칭을 붙이자면 '최강야구 1기'라고 할 수 있는 이승엽 감독의 시절부터 이미 최강야구는 인기를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최강야구의 인기가 본격적으로 폭발한 것은 이승엽 감독이 두산 베어스의 감독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그 뒤를 이어 여든두 살의 노장 김성근 감독이 2대 감독으로 취임하면서부터였습니다. 제가 무척 신기하게 생각했던 것은 김성근 감독이 처음으로 선수들과 만나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라운드에 모여서 시시콜콜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하하호호 떠들던 선수들이 멀리서 김성근 감독의 실루엣을 보자마자 웃음기를 거두고 벌떡 일어나서 모자를 벗으며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곽한영
부산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
2023-08-14
의미가 없다면 스윙도 없다.. 명분이 실리가 될 때
*이 글은 외부 필자인 곽한영님의 기고입니다. 형식은 실질과 다른 것일까? 고등학교 때 국사선생님이 임진왜란 부분을 강의하시다가 갑자기 화를 내면서 말씀하신 내용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양반은 얼어 죽어도 곁불은 쬐지 않는다'라는 속담을 언급하시면서 아니, 당장 얼어 죽게 생겼는데 다른 사람 사이에 끼어서 쬐는 곁불이면 어떻고 모닥불이면 또 무슨 상관이냐 일단 체면이고 뭐고 따지지 말고 '실질'을 추구해야 했는데 그놈의 양반의 체통 같은 거 찾다가 나라를 망하게 했다고 말이죠. 그러면서 선비들의 옷차림이 가진 허식을 예로 드셨습니다. 중인들이 패랭이나 짧은 갓, 몸에 딱 붙는 움직이기 편한 복장을 한 것에 반해 양반들은 커다란 갓, 거추장스러운 긴 소매의 옷을 입다 보니 행동도 불편하고 실용적이지 못했으며 이런 허례와 허식이 나라의 기풍으로 자리 잡다 보니 오랜 전쟁으로 철저하게 실용성을 추구하게 된 왜군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수업을 들을 땐 아하, 그렇구나, 그래서 그렇게 쉽게 전쟁에 패한 것이구나 양반들이 그렇게 쓸데없이 폼만 잡고 있지 않았어도 조선이 훨씬 강한 나라가 되었을 텐데 양반들의 무의미한 겉멋 때문에 정말 중요한 실속을 잃었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물론 그 후로도 여전히 그 선생님이 하신 말씀에는 충분히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점점 나이가 들면서 '반드시 그렇게만 볼 수 있는 문제일까?' 하는 조금 복잡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첫 사회생활로 교사를 하게 되면서 그런 의문은 더 커졌지요. 교사가 되고 난 후 한동안 출퇴근하기에도 편하고 학생들에게도 편하게 다가갈 수 있는 청바지에 티셔츠 같은 편한 복장으로 출근했는데 왠지 이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더라구요. 그래서 교생 실습을 할 때 사놓았던 정장에 넥타이를 매고 출근을 해봤습니다. 확실히 목도 답답하고 움직임도 불편해지긴 했지만 저 스스로도 교사라는 자각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고 학생들도 그간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신임 교사라고 쉽게 대하던 것과 달리 조금 더 예의를 차리려고 애쓰는 느낌이었습니다. 즉, 정장이라는 '형식'은 교사와 학생 사이에 필요한 적당한 거리와 역할 인식을 돕는 꽤나 실용적인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곽한영
부산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
2023-07-17
성공의 가장 강력한 무기, 집중력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이 글은 외부 필자인 곽한영님의 기고입니다. 연패의 이유 강아지도 걸리지 않는다는 오뉴월 감기에 한참 고생을 했습니다. 두통과 고열은 사흘 만에 잡혔는데 두 주가 넘어갈 때까지도 간간히 터져나오는 기침 때문에 힘들었습니다. 감기 때문에 가장 고민스러웠던 부분은, 팔자 좋은 소리라고 하실지 모르겠지만 취미 삼아 하는 동네테니스였습니다. 나름 동네 아저씨들 사이에서는 나쁘지 않은 승률을 자랑하고 있었는데 감기에 걸린 이후 두 주 내내 연패에 시달렸습니다. 사실 육체적으로는 못 뛸 만큼 힘든 건 아니었는데 뭐가 문제였을까 생각해보면, 그렇게 '뭐가 문제지?'라고 생각하는 게 문제였습니다. 코트에서 자꾸 딴생각이 들었다는 거죠. 날아오는 공에 계속 집중해야 하는데 감기로 집중력이 떨어져서 한 박자, 반 박자쯤 뒤에 '어, 공이네..'하면서 반응을 하니까 당연히 제대로 공을 맞힐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어느 경기에서는 멀쩡히 내 앞에 떨어지는 짧은 공도 쫓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구경만 하다가 그대로 공이 툭툭 튀어서 점수를 내주는 바람에 코트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당황한 적도 있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더 절실하게 느끼는 것은 모든 일에서 핵심은 집중력이고, 그 집중력이라는 것은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만들어지고 유지되기 힘든 것이며, 내가 아무리 대단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라도 집중력을 내내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근육에 내내 힘을 주고 있는 것이 힘들고 만약 그런 상태를 억지로 유지한다면 오히려 근육에 탈이 나는 것처럼 집중력은 긴장과 이완을 오르내리는, 붙잡아 내 것으로 하기에 그리 만만하지 않은 '예외적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런 집중력의 오르내림이 결국은 성공과 실패의 롤러코스터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이겠지요. 브라우저 전쟁 저의 대학시절은 IT업계의 태동과 격변이 시작되던 시점이었습니다.
곽한영
부산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
2023-06-22
우연을 어떻게 필연으로 바꿀 수 있을까?.. 아멜리아 에어하트 이야기
*이 글은 외부 필자인 곽한영님의 기고입니다. 전자기타를 포기한 이유 저는 취미 삼아 기타를 꽤 오래 쳐왔습니다. 처음 기타를 접한 것은 고등학생 때였는데 대학에 와서는 밴드를 하면서 전자기타를 배워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시는 지금처럼 유튜브 같은 매체를 통해 쉽게 기타 레슨을 접할 수도 없었고 혼자 공부할 만한 좋은 교재도 마땅치 않았기 때문에 주변에 기타를 가르쳐줄 만한 사람이 없다면 초보자가 길을 찾기는 쉽지 않은 시절이었습니다. 고민을 하던 저는 악기 상가들이 밀집해 있는 것으로 유명한 낙원상가에 가서 평소에 기타를 구입하던 단골 가게 아저씨로부터 불법복사된 해외 기타 레슨 비디오를 구입했습니다. 이제야 제대로 전자기타를 배울 수 있겠구나 두근거리며 어렵게 구해온 비디오테이프를 재생했더니 자막도 없는 영상에 담배를 꼬나문 노숙자 같은 아저씨가 나오는데 '아, 나한테 왜 이렇게 귀찮은 걸 시켜?'라는 나른한 표정인데 일단 '기본적인 손가락 풀기'라고 보여주는 연습방법부터가 왼손가락을 좌우로 한참 벌려야 지판을 짚을 수 있는 포지션이었습니다. 아무리 따라 하려고 해도 도대체 흉내를 낼 수가 없어서 화면을 정지해 놓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 사람의 손가락이 기타넥을 손으로 감싸면 손가락 두 마디가 넥 위로 올라올 만큼 긴 게 아니겠습니까. 아, 이건 애초에 아무나 흉내 낼 수 있는 게 아니고 특별한 신체조건을 갖춘 사람이나 가능한 거로구나 납득하고 곧바로 포기했습니다. 그래서 리드기타는 밴드의 다른 친구에게 넘기고 그럼 나는 좀 수월한 베이스기타를 맡아야겠다 싶어 다시 낙원상가에 가서 베이스레슨용 비디오를 구입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머리에 빨간 두건을 두른 아저씨가 나오는데 오른손, 왼손이 정신없이 돌아가는데 뭘 어떻게 짚는지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무지무지한 속주를 미술가 밥 아저씨처럼 '참 쉽죠? 이렇게만 하면 됩니다'라고 반복하며 보여주는 게 아니겠습니까? 와, 저런 별 볼 일 없는 레슨 비디오를 찍는 사람들도 저 정도 수준이면 이번 생에 나는 전자기타와는 인연이 없겠구나 싶어서 간신히 공연 곡 몇 개만 반주할 수준으로 배우고 전자기타는 포기해버렸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별 볼 일 없는 연주자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곽한영
부산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
2023-05-24
벤투 감독의 퇴장을 되돌려 보며.. 리더의 위치는 어디인가
*이 글은 외부 필자인 곽한영님의 기고입니다. 나폴레옹은 키가 작지 않았다? 우리는 흔히 '키가 작지만 위대한 업적을 남긴 위인'의 대표격으로 나폴레옹을 꼽곤 합니다. 그런데 얼마 전 페이스북 서핑을 하다가 어떤 분이 올리신 재밌는 글을 발견했습니다. '나폴레옹은 과연 키가 작았나?'라는 제목이었는데 나폴레옹이 사망한 후 부검 기록에 의하면 나폴레옹의 키는 168cm였다고 합니다. 당시 프랑스 성인 남성의 평균키였으니 그리 작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었을 텐데 왜 우리는 나폴레옹이 키가 작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일까요? 글을 쓰신 분은 이런 오해에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첫째는 나폴레옹의 경호를 맡았던 근위병들이 모두 키가 크고 건장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상대적으로 늘 작아 보이는 측면이 있었고, 둘째는 당시엔 나라마다 도량형이 달라서 1인치가 프랑스에서는 2.71cm 정도였는데 영국에서는 2.54cm라서 나폴레옹의 키가 5피트 2인치라는 보고서를 입수한 영국에서 나폴레옹의 키를 157cm 정도로 추측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에게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세 번째 이유였습니다. 당시 나폴레옹의 별명이 'Le Petit Caporal'이었는데 영 어로 번역하자면 'The Little Corporal' 그러니까 '꼬마 부사관'이었습니다. 당연히 이 별명을 들은 사람들은 도대체 나폴레옹이 얼마나 작으면 프랑스 군인들마저도 '꼬마'라고 불렀을까 생각하게 된 거죠. 그런데 이 부분은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 보면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됩니다. 나폴레옹은 당시 프랑스군의 최고사령관이자 나중에 황제의 자리에까지 오르는 인물인데 이런 까마득한 상관에게 '꼬마', 게다가 사령관도 아니고 '부사관'(미국식으로 따지면 상병)이라고 부르는 게 말이 되는 일일까요? 상관의 뒷담화 자리에서나 몰래 등장할 듯한 모욕적인 표현이 나폴레옹의 공식적인 별명이었다는 것은 이 표현이 나폴레옹을 깎아내리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칭찬하는 말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널리 알려져 있는 것처럼 나폴레옹은 프랑스 가장 변방의 섬이었던 코르시카에서 태어난 촌뜨기로 파리에 올라와 초급 장교에서부터 시작해 최고의 자리에까지 올라간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곽한영
부산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
2023-04-21
태도가 인간을 완성한다.. 오드리 헵번 이야기
Manner Maketh Man. 영국의 이른바 '신사'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비밀첩보조직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킹스맨'은 세계적으로 흥행하면서 후속작까지 제작되었습니다. 그런 성공의 큰 부분은 말쑥한 영국 신사의 이미지에 딱 들어맞는 귀티 넘치는 배우 콜린 퍼스의 활약 덕분이었는데 특히 그가 깡패들을 때려눕히기 전에 멋지게 내뱉는 'Manner Maketh Man'이 영화 전체를 대표하는 대사로 많은 이들의 기억에 남았습니다. 영국 귀족답게 현대어인 'makes'가 아니라 고어인 'maketh'로 발음한 이 영국 속담은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로 번역되어 마치 신사가 되려면 매너가 있어야 한다는 것처럼 이해하는 분들이 많았지만 실은 보다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일단 'man'은 '남자'라기보다는 보편적인 '인간'으로 보아야 할 것이고 'make'도 '만든다'라는 의미보다는 '완성한다'는 의미에 가까울 것입니다. 즉, 인간은 그저 태어난다고 다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고 매너를 갖추었을 때 비로소 제대로 된 인간으로 완성되는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지요. 문제는 'manner'라는 단어입니다. 차라리 예의 바름, 친절함 등 그 자체로 좋은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였다면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정도로 쉽게 해석될 수 있는 말일 텐데 '매너'는 그 의미가 좀 다릅니다. 사전적으로 보자면 '매너'는 '일이 되어가는 방식'이고 '다른 사람을 대하는 외면적인 태도'입니다. 즉, 사회적으로 반복적으로 통용되고 고정되어 있는 어떤 코드에 따라서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이 '매너'의 기본적인 의미인 것입니다. '매너'는 좋은 의미인 반면 매너에 얽매이는 '매너리즘'은 '항상 틀에 박힌 일정한 방식이나 태도를 취함으로써 신선미와 독창성을 잃는 일'로 부정적인 의미를 갖게 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합니다. 이 둘 사이의 거리감은 어째서 발생하게 된 것일까요? 이 속담이 애초에 답하고자 하는 질문은 '인간은 무엇으로 인간이 되는가, 무엇으로 제대로 된 인간이 되는가'일 것입니다. 당연히 제대로 된, 완성된 인간은 우선 그 자신이 '괜찮은 사람'으로 내재적으로 완성되어 있어야 합니다. 다정하고, 친절하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배려하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겠죠. 문제는 그런 내재적 가치는 결국 외면으로 드러나는 무언가를 통해 확인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매너'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내재적 가치를 외부로 표현하는 양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곽한영
부산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
2023-03-29
바위절벽을 오르는 두 사람.. 성공의 기준은 누가 정할까?
*이 글은 외부 필자인 곽한영님의 기고입니다. 이 산이 그 산이 아니라면? 인생을 산에 비유한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일은 힘겨운 오르막길을 끊임없이 오르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이는 힘이 좋아 다른 사람들보다 빠르고 힘차게 오르고, 어떤 이는 지독한 의지와 노력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끊임없이 오르며, 눈이 밝고 요령이 좋은 이는 더 편하고 빠른 지름길을 찾아 약삭빠르게 앞질러 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은 몇 걸음 옮기다 숨이 가빠져서 나무 등걸에 앉아 쉬고, 혹은 이만하면 됐지 않나 싶어 중턱에 주저앉거나 심지어 모든 걸 포기하고 산 아래로 굴러떨어지기도 할 것입니다. 이런 '보통의 우리들'은 나를 지나쳐 잰걸음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까마득한 곳을 향하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는 데 익숙하지만 이런 '부러움'에는 한 가지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이들이 올라가고 있는 산이 '올바르고도 유일한 산'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 산이 원래 오르려고 했던, 꼭대기에 '행복'이라는 구름이 기다리고 있는 산이 아니라면 어떨까요? 혹은 다투어 오르려 했던 이 산의 봉우리가 이것 하나뿐이 아니고 여러 개라면, 혹은 사람의 숫자만큼이나 많다면 우리의 부러움은 애초에 의미가 없는 일이 아닐까요? '성공과 실패'라는 말은 자칫하면 피라미드의 꼭대기와 바닥, 직선으로 이어진 도로의 시작과 끝처럼 일직선으로 이어진 연속된 하나의 선을 상상하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착시현상을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오늘은 각자의 방식으로 실패하고, 각자의 방식으로 삶에서 성공을 거둔 두 남자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록클라이밍의 시대 1950년대에서 60년대에 이르는 시기의 미국은 풍요의 절정이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의 승리로 세계 최강대국의 자리에 올랐고, 전쟁에서 돌아온 이들은 영웅대접을 받으며 경제적 호황의 과실 덕분에 안정된 직장과 높은 수입, 후에 '베이비붐 세대'로 불릴 만큼 많은 아이들을 낳으며 행복한 가정을 꾸렸습니다. 집집마다 자동차가 보급되고 일본인들이 '3종 신기'라고 불렀던 TV, 냉장고, 세탁기가 확산되면서 여가시간도 늘고 엔터테인먼트의 종류도 다양해졌습니다.
곽한영
부산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
2023-02-24
운칠과 기삼, 무엇이 중요할까.. 페니실린 이야기
*이 글은 외부 필자인 곽한영님의 기고입니다. 1.운칠기삼? 코로나로 인한 전 세계적인 팬데믹 사태가 조금씩 잦아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뒤늦게 통제완화에 나선 중국의 후유증이 여전히 국제뉴스를 장식하고 있습니다만 특별한 추가 변종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올해 하반기부터는 2020년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기대되는 상황입니다. 불과 2년 전, 전 세계가 패닉에 빠졌던 때를 돌이켜보면 인류의 회복력은 대단하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팬데믹 사태가 발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평소라면 10년이 넘게 걸린다던 백신과 치료제 개발이 빠르게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놀랍고 반가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당시 가장 빠르게 보급이 이루어진 3대 백신 가운데 하나인 아스트라제네카는 효과도 좋았지만 화이자, 모더나 등 다른 백신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해서 더 각광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아스트라제네카의 보급을 앞두고 급하게 임상시험을 진행한 결과 원래 개발진이 설정한 분량보다 절반만 투여한 경우 효과가 더 높다는 뉴스가 보도되었습니다. 안 그래도 가격이 싼 아스트라제네카의 경쟁력이 더 높아지겠네, 개발진도 몰랐던 걸 임상시험 과정에서 밝혀낸 저 연구원은 회사 측으로부터 엄청난 상금을 받겠구나 생각하며 좀 더 자세한 뉴스를 찾아보니 엉뚱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절반을 투여하는 게 더 효과가 높다는 걸 밝혀낸 임상연구원은 어떤 이론적 배경이나 논리를 가지고 실험을 한 게 아니라 단순히 실수로 원래 투여해야 할 용량의 절반만 주사한 것인데 이걸 뒤늦게 알게 되었고, 일단 실험투여가 다 끝나버렸으니 엄청난 실수를 되돌릴 방법이 없어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오히려 항체 생성 효과가 더 크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사실 전 세계가 백신 개발에 주목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실수로 중요한 임상시험을 망쳤다면 직을 내놓는 것은 물론이고 엄청난 손해배상 책임을 질 수도 있었을 텐데 오히려 회사 측의 백신 생산량을 두 배로 늘려주면서 효과는 더욱 높이는 엄청난 공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말 그대로 순전히 우연의 산물이었던 것이죠. (참조 - 반 개 효과가 더 컸다?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임상시험 수수께끼)
곽한영
부산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
2023-01-26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여유.. 제임스 카메론 이야기
*이 글은 외부 필자인 곽한영님의 기고입니다. 1.딱 한 번의 예외 이 글을 쓰고 있는 2022년 12월 말 현재,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오랜만의 신작인 '아바타2'가 개봉되어 다시 세계적인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런닝 타임이 3시간 10분이나 되고 이 영화를 제대로 즐기려면 아이맥스 3D 상영관을 찾아야 하기 때문에 티켓 가격도 대단히 높다는 제한이 있음에도 영화를 본 이들이 입을 모아 '완전히 새롭고 환상적인 경험'이라고 칭찬하며 관객과 평론가 모두의 호평을 이끌어내고 있기 때문에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장식하는 또 다른 대표작이 될 것 같습니다. 사실 '아바타2 : 물의 길'은 개봉 전까지 우려의 시각이 적지 않았습니다. 일단 제작 기간이 계속 늘어지면서 애초 예정되었던 2017년 개봉이 한해 한해 밀려 5년이나 늦어지게 되었고, 도중에 전 세계적인 코로나 사태까지 겹친 끝에 아직도 중국 등 상당 지역에서는 완전한 정상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이며, 무엇보다 너무 많은 제작비가 투입된 영화였기 때문입니다. '아바타2'에 들어간 제작비와 마케팅 비용은 약 4억달러, 우리 돈 5000억원을 넘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물론 함께 제작된 '아바타3'의 비용 일부까지 포함된 것이라고는 해도 할리우드 역사상 가장 비싼 영화이기 때문에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개봉 전 인터뷰에서 스스로 '상업적 차원에서 보자면 이 영화는 최악의 영화'라고 고백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엄청난 제작비가 들어갔음에도 많은 이들은 '아바타2'가 손익분기점을 쉽게 넘을 것이고 오히려 관심은 최고 흥행기록을 갱신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역대 최고 흥행영화 기록을 살펴보면 재밌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현재 역사상 가장 큰 흥행을 기록한 영화 1위는 2009년 29억달러의 흥행을 기록한 '아바타'이고 2위가 2019년 27억달러를 기록한 '어벤저스:엔드게임', 3위가 1997년 22억달러를 기록했던 '타이타닉'입니다. 즉, 역사상 최고 흥행 1위, 3위 영화가 모두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영화이고 이번엔 '아바타2'로 그 자신이 세운 기록을 또 한 번 깨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대단한 감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그는 이 외에 여러 개의 초대형 블록버스터 영화를 연달아 찍으면서도 거의 실패를 경험하지 않은 능력 있는, 아니 그를 넘어 예외적일 만큼 운이 좋은 감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곽한영
부산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
2022-12-26
모든 것은 때가 있다는 걸 깨달을 때
*이 글은 외부 필자인 곽한영님의 기고입니다. 영웅본색의 기억 요즘 유난히 피곤함을 많이 느껴서 소파에 잠시 누워있는다는 게 그만 곤히 곯아떨어져 버렸다가 저녁때가 되어서야 퍼뜩 깼습니다. 거실 창밖으로 기울어가는 햇빛을 받으며 멍하니 앉아있다가 정신을 좀 차리려고 TV를 켰더니 '영웅본색2'가 방영되고 있더군요. 너무 많이 봐서 장면 장면을 모두 외우다시피 한 영화, 그래서 무방비한 상태로 화면을 건너다보고 있는데 이 장면이 나왔습니다. 역시 익숙한 장면인데...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 위화감의 정체가 뭘까 기억을 더듬어 보니 분명 여러 번 본 장면이지만 내가 맨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의 느낌이 지금과 완전히 달랐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하나 기억이 되살아나더군요. 저기서 왼쪽으로 패닝하며 돌아가는 카메라, 인물들을 가볍게 가렸다가 다시 살려내는 중앙의 하얀 기둥, 특히 배경의 저 눈부시게 커다란 나무와 나뭇잎, 멀리 붉어지는 단풍의 화려함까지, 저 두 사람이 몇 개의 계단을 올라 포치에 올라서는 저 장면이 슬로우비디오로 돌아가면서 뉴욕의 가을 속으로 나를 곧장 빨아올려 옮겨놓는 것 같던 기분... 그런데 지금 보고 있는 화면에서는 그런 '거대함'과 '몰입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VOD의 시대가 되어 이 영화를 여러 번 다시 보았지만 맨 처음 보았을 때의 가슴 저리는 감동을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화질이 좋지 않아서일까 싶어 리마스터링된 블루레이를 구입해서 보기도 했지만 느낌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역시 큰 화면, 좋은 음향을 갖춘 극장에서 보았을 때의 그 압도적인 느낌은 아무리 화질이 좋아져도 되살려내지 못하는구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늘, 잠에서 덜 깬 멍한 머리로 다시 저 장면을 보면서 퍼뜩 생각났습니다.
곽한영
부산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
2022-11-28
초조한 사람들이 모여 만든 걸작
*이 글은 외부 필자인 곽한영님의 기고입니다. '마리오 푸조'는 초조했습니다. 이미 그의 나이 45세, 전업 작가로 나선 이후 장편소설을 두 편이나 썼지만 제대로 된 히트작도 없이 허송세월을 하는 사이 친척들과 도박장에 진 빚만 자그마치 2만 달러를 넘어가고 있었거든요. 이 난국을 타개하고자 어떻게든 '돈이 되는' 소설을 쓰겠다는 각오를 세운 그는 다른 작가들이 저속한 소재라고 피하던 갱, 섹스, 마약이 난무하는 범죄소설을 계획했고 시간도 돈도 없던 터라 제대로 된 자료수집도 못 하고 심지어 진짜 마피아는 한 명도 못 만나본 상태에서 오로지 신문과 잡지의 쪼가리 가십 기사들을 조합한 위에 상상력을 동원하여 100페이지짜리 마피아 소설 초안을 만들었습니다. '피터 바트'도 초조했습니다. 그는 월스트리트저널과 뉴욕타임스에서 객원기자로 10년이나 일했으나 정식 기자로 채용될 가망은 요원해 보였고 이젠 생계를 이어나가기도 힘든 상황이었죠. 아예 영화계에 몸을 담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에서 인생행로를 꺾어 굴지의 영화사인 파라마운트의 제작 담당으로 입사했으나 뒤늦게 영화판에 뛰어든 펜대 굴리는 사람에게 제대로 된 프로젝트가 주어질 리 없죠. 그래서 그는 스스로 쓸 만한 원작소설을 발굴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히트한 소설은 저작권료도 그만큼 높을 테니 그에게 순서가 오질 않았고 아직 출판되기 전이라 비교적 싼 값에 계약을 맺을 수 있는 작품을 찾아다녔습니다.
곽한영
부산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
2022-11-03
언젠가 세상은 이야기가 될 것이다
*이 글은 외부 필자인 곽한영님의 기고입니다. 이미지와 스토리 제가 박사 학위 논문을 쓰던 시절 논문을 준비하던 다른 친구들과 자주 하던 잡담 주제 중에 '어떤 성이 가장 박사다운가?'라는 엉뚱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나중에 우리 논문이 통과되어 학위를 받으면 각자의 성을 붙여서 '김 박사, 이 박사'로 불릴 텐데 경우에 따라 이게 멋지게 혹은 어색하게 들리기 때문입니다. 연배가 오래된 사람들이라면 '김 박사'라고 하는 순간 태권브이를 떠올릴 것이고 '이 박사'는 나름 무난했는데 '이박사 디스코'가 나오면서 약간 재밌는 느낌으로 바뀐 듯하고 '안 박사'는 언제까지나 박사가 아닌 느낌이고 '박 박사'는 학위 후에 바닥을 박박 기면서 고생할 것 같은 느낌이랄까.. 저의 경우는 '곽 박사'인데 발음이 너무 세서 아무래도 별로인 쪽으로 분류되었고 만장일치로 가장 멋진 케이스는 '설 박사'로 모아졌습니다. 발음도 좋고 뭔가 깊이감도 느껴지구요. 우연인지 몰라도 실제 제 주변에 있던 설 박사는 동기들 중 가장 먼저 교수에 임용되기도 했습니다. 다 웃자고 하는 농담입니다만 이런 '이미지'가 사람을 판단하는데 알게 모르게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 같습니다. 얼마 전 돌아가신 '이어령 교수님' 같은 경우는 이름만 들어도 지적인 향기가 막 나지 않나요?
곽한영
부산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
2022-10-04
“야, 너. 군대 가고 싶냐, 안 가고 싶냐?”
*이 글은 외부 필자인 곽한영님의 기고입니다. "군대 가고 싶냐, 안 가고 싶냐?" LG와 삼성은 지금도 우리나라, 아니 세계의 가전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전통의 라이벌입니다. 제 기억에 이 두 회사가 가장 본격적으로 라이벌 구도를 형성한 영역은 70년대 텔레비전 시장에서부터였습니다. 아직 럭키 주식회사와 금성사가 통합해서 'LG'가 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삼성전자의 '이코노텔레비전'에 '금성전자'가 맞서 싸우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금성전자에서 대대적인 광고캠페인을 벌이면서 내놓은 유명한 카피가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합니다'였습니다. 당시엔 가전제품이 일반인들의 입장에서는 큰맘 먹고 사야 할 만큼 값비싼 물건이었기 때문에 되도록 고장 없이 오래 쓰는 게 중요했는데 '전파사'에 가서 삼성TV를 살까 금성TV를 살까 고민할 때 '디자인이나 잡다한 기능에 혹해서 충동적으로 삼성을 선택하면 후회할 거다, 우리 금성 제품을 선택해야 오래오래 잘 쓸 수 있다' 이런 의미를 담은 카피였습니다. 사실 당시 삼성 이코노TV에 비해 디자인이 밀린다는 평가를 받던 금성전자에서 '그래도 우리 물건이 튼튼하긴 해요'라며 고육지책으로 내놓은 주장에 가까웠지만 저 카피만큼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으며 유행어가 되었습니다. 누구나 아주 짧은 순간, 별 생각 없이 했던 선택으로 인생의 행로가, 성공과 실패가 크게 엇갈리는 경험을 한 번쯤은 해보았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저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벌써 30년도 더 지난 일이네요. 당시 저는 우리나라 남자들이라면 누구나 피할 수 없는 병역의 의무를 지기 위해 징병검사를 받고 있었습니다. 저는 어릴 때 잔병치레가 많긴 했지만 운동을 좋아해서 청소년기에는 거의 병원구경을 하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에 어차피 1급 현역판정을 받을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얀 팬티 한 장만 입은 수십 명의 청년들이 커다란 건물 안을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이 민망한 상황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요즘은 교통비로 몇천원이라도 준다던데 점심은 뭘 사 먹을까 이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멍하니 나무 벤치에 앉아 다음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전에 검사를 했던 군의관이 저를 손짓해서 불렀습니다. 이미 지나간 순서로 되돌아가는 일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순간 당황했습니다.
곽한영
부산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
2022-09-14
기쁨도 독이 된다.. 프로들이 루틴을 지키는 이유
*이 글은 외부 필자인 곽한영님의 기고입니다. 스포츠 경기에 '흐름'이 있을까? 스포츠 경기 중계를 보다 보 면 해설자가 '흐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종종 듣게 됩니다. 예를 들어 프로야구 중계에서 나오는 이런 표현들 말입니다. '이제 흐름이 롯데에게 완전히 넘어왔어요' '아, 이렇게 되면 LG쪽으로 흐름이 넘어가죠' 'KT선수들이 한번 흐름을 타면 걷잡을 수 없죠' 그런데 매번 이 표현을 들을 때마다 약간 고개가 갸우뚱해지곤 했습니다. 뭔가 그럴듯해 보이는 말이긴 하지만 정말로 야구 경기에 물이나 바람처럼 '흐름'이 존재하는 것일까요? 바둑이나 장기처럼 앞에 둔 수가 누적되어서 계속해서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게임이라면 '흐름'이라는 말이 성립되겠지만 야구는 한 타석, 한 타석이 따로따로 이루어지는, 통계 용어로 말하자면 앞의 행위가 뒤의 행위에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없는 '독립시행'이 기본인 스포츠잖아요. 마치 이번에 주사위를 굴렸는데 1이라는 낮은 숫자가 나왔다고 해도 다음 번 주사위를 굴리기의 결과엔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듯이 앞 타석 선수가 삼진을 당했다고 다음 타석 선수가 홈런을 치지 말라는 법도 없고 앞 이닝에서 호수비를 했다고 해서 다음 이닝 공격에서 더 유리해질 이유도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흐름이란 경기에 스토리를 부여해서 시청자들이 재밌게 보도록 하기 위한 일종의 '스토리텔링'이거나 그저 어느 팀이 현재 분위기가 좋다 혹은 나쁘다 정도의 '기세'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이게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게 된 사건이 하나 생겼습니다. 지난 6월에 있었던 윔블던 테니스 대회의 한 경기를 보면서 든 생각이었습니다. 남자 단식 1라운드 경기였던 라파엘 나달 선수와 아르헨티나의 세룬돌로 선수의 경기였는데
곽한영
부산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
2022-08-08
가진 걸 단번에 포기하는 결단은 어떻게 가능한가.. 가리발디 이야기
*이 글은 외부 필자인 곽한영님의 기고입니다. 이상한 벽화 이 그림은 이탈리아 시에나의 시민박물관에 있는 프레스코 벽화입니다. 피에트로 알디라는 화가의 작품으로 제목은 '테아노에서 가리발디와 만나고 있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1886)입니다.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이탈리아 북부 지방을 차지하고 있던 사르데냐 왕국의 국왕이었던 에마누엘레 2세가 이탈리아 남부를 평정한 가리발디로부터 남부 지역의 지배권을 넘겨받아 통일 이탈리아가 처음으로 탄생한 1860년 10월 26일의 역사적인 장면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간단한' 설명을 곱씹어보면 뭔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의문들이 뭉게뭉게 피어오릅니다. 이탈리아를 남과 북으로 나눠서 차지한 상태라면 당연히 이제 '왕중왕 결정전'이 벌어져야 할 순서가 아닌가요? 가리발디는 왜 본 게임에 들어갈 생각도 하지 않고 항복한 것일까요? 아니, 저게 지금 항복하는 장면이 맞긴 한가? 두 사람 다 말에 타고 있을 뿐 아니라 친근하게 악수를 하고 있잖아요? 그림을 자세히 보면 더 신기한 것들이 많습니다. 악수를 하고 있는 두 사람 중 누가 국왕이고 누가 가리발디일까요? 당연히 당당하게 버티고 서있는 흑마 위에 위엄넘치는 망토를 두른 왼쪽 사람이 국왕이고 군복을 입고 말도 사람도 긴장해서 자세가 흐트러져 있는 오른쪽이 가리발디일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입니다. 가리발디는 빅토리아 시대에 방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머리카락에 담배냄새가 배지 않도록 썼던 납작한 원통 모양의 '스모킹 캡'을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쓰고 다녔으니 왼쪽이 가리발디이고
곽한영
부산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
2022-07-13
조 윌프리드 송가, 최고가 될 수 없었던 최고의 선수 이야기
*이 글은 외부 필자인 곽한영님의 기고입니다. 엎드려 우는 사나이 최근 코로나가 막바지에 들어가면서 야외활동 특히 스포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인기 종목인 프로야구나 축구의 인기도 여전하지만 요즘 갑작스럽게 더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종목으로 테니스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보는 스포츠보다는 하는 스포츠로서 접근성도 좋은 편이고 테니스 패션이라고 불리는 셔츠, 스커트, 모자 등의 산뜻한 기능성에 주목하는 이들도 많아져서인 모양입니다. 하지만 세계적인 차원에서 보면 테니스 역시 보는 스포츠로서, 특히 프로의 영역에서 오랜 시간 인기를 유지해온 종목입니다. 워낙 저변이 넓고 선수들도 많다 보니 전 세계에서 열리는 대회의 숫자도 어마어마한데 현재는 마치 피라미드처럼 대회의 수준과 형식이 체계화되어 열리고 있습니다. 대회에 입상하면 얻게 되는 랭킹포인트와 상금을 차등화해서 이걸 바탕으로 세계 랭킹이 정해지기 때문에 상급의 대회에 나가려면 꾸준히 여러 대회에 참여해서 포인트를 쌓아야 합니다. 가장 아래에 ITF 월드테니스 투어, 그 위에 ATP 챌린저 투어, 250투어, 500투어, 마스터스 1000 투어까지 층층시하인데 그 피라미드의 맨 꼭대기에 있는 가장 영예로운 4개의 대회를 '그랜드 슬램'이라고 부릅니다. 네 개의 대회는 열리는 시기를 순서대로 말씀드리면 호주 멜버른에서 1월에 열리는 호주 오픈, 프랑스 파리에서 5월에 열리는 롤랑가로스 오픈, 영국 런던에서 6월 말에 열리는 윔블던 대회, 8월 말에 미국 뉴욕에서 열리는 US 오픈입니다. 이 네 개의 대회는 열리는 시기나 대륙, 기후가 모두 다르기도 하지만 코트 자체의 성격도 달라서 팬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킵니다. 호주 오픈과 US오픈은 모두 파란색 하드코트이지만 롤랑가로스는 '클레이코트'라고 불리는 흙으로 된 바닥이고 윔블던은 잔디코트입니다. 코트의 재질에 따라 공이 튀는 각도나 속도, 선수들의 스텝 등이 모두 달라지기 때문에 다양한 선수들이 두각을 나타내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그중 롤랑가로스의 흙바닥은 붉은 벽돌을 가루로 만들어 만드는 '앙투카' 재질이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코트가 붉은색을 띠게 됩니다. 앙투카는 롤랑가로스의 상징과 같아서 대회가 열리는 현지에서는 앙투카를 유리병에 담아 기념품으로 팔기도 합니다. 올해 롤랑가로스 대회 3일 차였던 지난 5월 24일 한 남자 선수가 이 앙투카 코트에 머리를 대고 엎드려 흐느끼고 있었습니다.
곽한영
부산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
2022-06-15
"나 아직 안 죽었어!".. 필 콜린스의 버티는 삶에 대하여
*이 글은 외부 필자인 곽한영님의 기고입니다. 모든 걸 다 가진 기성세대 한때 영국을 대표하는 유명 그룹이었던 '오아시스'의 두 형제 노엘 갤러거와 리암 갤러거는 입이 험하기로 유명했는데 특히 별다른 친분이나 개인적인 인연도 없던 필 콜린스를 툭하면 욕하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들의 음악 여정을 그린 영화 '수퍼 소닉'을 보면 서로를 욕할 때 '이런 필 콜린스 같은 자식아!'는 기본이고 '필 콜린스의 머리를 잘라다가 냉장고에 넣어야 돼'라는 밑도 끝도 없는 끔찍한 말을 낄낄거리며 내뱉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은 왜 그렇게 필 콜린스를 싫어했던 것일까요? 무명의 그룹으로 바닥을 전전하던 시절의 오아시스에 필 콜린스는 같은 영국 출신의, 대중적으로 가장 성공한, 심지어 락도 아니고 상업음악인 팝음악을 하는 '기성세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1951년생인 필 콜린스는 '제네시스'라는 전설적인 프로그레시브 그룹의 드러머로 커리어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상업적 성공을 거두지 못해 슬럼프에 빠진 제네시스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과정에서 'Invisible Touch'라는 신스팝을 연주하는 그룹으로 변화시키는 주역이 되는데 예술 음악을 하던 시절 제네시스의 골수팬들에게 이런 '변화'는 '변질'이자 '배신'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필 콜린스는 드럼 연주도 수준급이었지만 노래도 잘 부르고 작사, 작곡, 편곡까지 못하는 게 없는 만능 엔터테이너였습니다. 그런 능력을 바탕으로 아예 제네시스를 벗어나 솔로로 독립하면서 그는 빌보드 차트를 석권하는 훨씬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음악에 대한 욕심이 많았던 그는 대스타가 되고 난 후에는 최고의 세션맨들, 특히 웬만한 가수들은 비용이 엄두가 안 나서 앨범 녹음할 때도 부르기를 주저하는 풀브라스밴드를 본인의 백밴드로 대동하고 다니면서
곽한영
부산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
2022-05-19
나로 살아가는 일의 어려움.. '로버트 카파'는 누구인가
*이 글은 외부 필자인 곽한영님의 기고입니다. 전설의 종군기자 전투기를 타고 하늘을 날며 생과사를 넘나드는 용병들의 이야기를 그린 걸작 만화 '에어리어 88'에는 거칠기 짝이 없는 용병들의 사이를 니콘 카메라 하나만 멘 채로 누비는 종군기자가 한 명 나옵니다. 글 쓰는 이들이 흔히 갖게 되는 유약한 이미지 대신 그는 용병들 못지않은 전사처럼 느껴지고 그에게 카메라는 용병들에게 주어진 전투기와 기관총에 손색없는 완벽한 무기이자 분신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이런 '목숨을 걸고 전장을 달리는 종군기자'의 이미지를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시킨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로버트 카파'일 것입니다. 그는 공수부대와 함께 낙하하고, 상륙부대와 함께 노르망디에 상륙했습니다. 스페인 내전과 이스라엘 독립전쟁 등 가장 위험한 전쟁의 현장 어디에나 있었으며 끝내 인도차이나 전쟁 취재 중 지뢰를 밟고 폭사하는 것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이런 열정적인 사진작가 정신은 어느 카메라 회사의 광고카피로도 쓰인 '당신의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당신이 충분히 가까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라는 보도사진계의 명언으로 남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충분히'가 아니라 '너무' 가까이, 그것도 '너무 자주' 현장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무모하다 할 만큼, 마치 스스로 현장에서 죽기를 원하는 사람처럼.... '로버트 카파'의 탄생 그는 가난한 유태계 헝가리인이었습니다. 본명은 앙드레 프리드먼. 안 그래도 유럽에서 국외자 취급을 받던 유태계인 데다 여러 강대국에 이리저리 치이는 소국인 헝가리 출신이니 기를 펴기가 쉽지 않았겠죠. 그나마도 반정부시위 전력으로 헝가리에서마저 추방을 당해서 그는 독일에서 사진가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하게 됩니다.
곽한영
부산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
2022-04-18
천재 사이에 끼었을 때의 자세.. 인생은 링고 스타처럼
*이 글은 외부 필자인 곽한영님의 기고입니다. '성공과 실패' 이야기, 이번이 세 번째네요. 앞선 '피로스의 승리 이야기'나 '세 명의 탐험가 이야기'가 모두 뒷맛이 씁쓸한 이야기들이어서 이번엔 '진짜 성공한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 준비해봤습니다. (참조 - '피로스의 승리' 성공 같은 실패는 왜 일어나는가) (참조 - 누가 성공한 사람일까.. 세 명의 탐험가 이야기) 오늘의 주인공은 20세기 최고의 그룹으로 손꼽히는 비틀즈의 드러머 '링고 스타'의 이야기입니다. 천재 사이에 끼었을 때의 자세 워낙 유명한 그룹이긴 하지만 혹시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사진을 하나 보여드릴게요. 이 사진의 왼쪽 위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폴 매카트니, 존 레넌, 링고 스타, 조지 해리슨의 순서입니다. 아마 비틀즈에 관심이 없는 분들도 폴 매카트니와 존 레넌은 많이 아시지 않을까 싶네요. 사실 비틀즈의 활동과 성공과정에서 이 두 사람의 비중이 단연 압도적이긴 했습니다. 비틀즈 노래의 대부분을 작사, 작곡했는데 워낙 천재들이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만든 곡들이 많다 보니 (예를 들어 'Hey Jude'의 경우 앞부분은 폴이, 뒷부분 '나나나'는 존이 만들어서 붙여서 완성된 곡입니다) 아예 각 곡의 작사작곡 크레딧을 표기할 때 두 사람의 공동작사/작곡으로 표기하는 것이 비틀즈의 관행이 되어버렸을 정도였습니다. 이 두 사람은 연주 실력도 상당한 수준이었는데 거의 모든 악기를 다룰 수 있는 폴 매카트니는 기타도 아무에게 배우지 않고 혼자 익히다 보니 특이하게도 오른손으로 코드를 잡는 왼손잡이 기타리스트가 되었고 스스로 개발한 독특한 기타주법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곽한영
부산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
2022-03-23
누가 성공한 사람일까.. 세 명의 탐험가 이야기
*이 글은 외부 필자인 곽한영님의 기고입니다. 성공과 실패 이야기, 지난번에는 수없이 많은 승리를 거두었으나 결국 단 한 번도 승리하지 못했다는 아이러니한 결과로 인생을 마무리한 '피로스의 승리' 이야기를 들려드렸죠? (참조 - '피로스의 승리' 성공 같은 실패는 왜 일어나는가) 이번에는 좀 더 다양한 삶의 양상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과연 무엇을 성공이라고 혹은 실패라고 말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려 합니다. 1. 로버트 스콧 : 장엄한 최후, 하지만... 19세기 말은 유럽에서 제국주의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입니다. 바다를 제패한 영국이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으로 최고의 패권을 누리고 있었고 영국의 영원한 라이벌 프랑스 역시 전 세계로 진출해 식민지를 넓히고 있었으며,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해 역시 제국의 대열에 합류한 독일은 유럽의 신흥강자로 떠오르고 있었죠. (1) 남극의 의미 이제 지구상의 웬만한 곳에는 거의 다 제국의 손길이 뻗친 상황에서 마지막 남은 곳은 혹독한 추위로 버려진 땅으로 여겨지던 극지 지역, 즉 남극과 북극이었습니다. 이 중 북극은 북극해의 얼음바다를 뚫고 지나가는 '북극 항로'를 발견할 수 있다면 북미 대륙의 동쪽과 서쪽을 효율적으로 연결할 수 있었기 때문에 캐나다, 미국 등 북미 국가들이 탐험에 더 적극적이었고 결국 최초로 북극점에 도달한 것도 미국인 탐험가 '피어리'(Robert Edwin Peary)였습니다. 이제 남극은 유일하게 남은 미개척지, 인류의 마지막 도전 대상으로 더 큰 관심을 모으게 되었습니다.
곽한영
부산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
2022-02-21
'피로스의 승리' 성공 같은 실패는 왜 일어나는가
*이 글은 외부 필자인 곽한영님의 기고입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부산대에서 법을 가르치고 있는 곽한영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한 달에 한 번, 다섯 번에 걸쳐 앞으로 아웃스탠딩을 통해 '성공과 실패'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서 세상 어딘가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꿈을 향해 도전하고 그 과정에서 혹은 성공하고 혹은 실패하는 모습들이 폭죽처럼 반짝이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겉으로 화려하게 보이는 그 반짝임이 진실의 전부일까요? 어떤 경우엔 성공 같아 보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실패한 것으로 보이는 일도 있고, 반대로 실패한 일이라도 성공에 못지않은 성과를 거두는 경우도 있습니다. 세상 속에 숨어있는 그런 성공과 실패의 이야기와 그 이면의 속사정들을 옛이야기하듯 들려드리는 시간을 가져볼까 합니다. 전쟁의 천재 오늘 첫 번째로 들려 드릴 이야기는 '피로스의 승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제국을 꼽는다면 어디가 떠오르시나요? 현재 의문의 여지 없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인 미국도 있고, 역사상 가장 많은 땅을 정복했다는 징기스칸의 몽골 제국이나 중국을 통일한 진 제국도 있었죠. 하지만 가장 오랜 기간 동안, 광대한 땅을, 확실한 권력을 바탕으로 지배한 대표적인 제국은 역시 로마 제국을 꼽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고대 서구 사회의 거의 전 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지중해 일대를 모두 차지하고 아무도 대적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을 오랫동안 유지했으며 정치, 경제, 문화적 성취도 탁월해서 로마 제국이 사라지고 천년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로마의 영향력은 세계 곳곳에 남아있을 정도니까요. 이렇게 강력한 로마 제국도 천 년의 역사 속에서 적지 않은 위기를 겪습니다만
곽한영
부산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
2022-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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